
프랑스 소요사태의 원인
이번 소요사태의 직접적인 계기는 2005년 10월 27일에 저소득층 이민가정이 몰려 사는 파리 교외 클리시 수 부아(Clichy-sous-bois)에서 경찰 검문을 피해 달아나던 아프리카계 10대 청소년 2명이 감전사 당한 사건이었다. 사건 발생 일주일 전에 당시 프랑스 내무장관이었던 사르코지(Nicolas Sarkozy)는 파리 교외 빈민지역에서 끊임없이 발생되는 범죄, 폭력사건에 대항하기 위해 “똘레랑 스 제로”(Tolerance Zero)라는 범죄와의 전쟁을 선언한 바 있었다.이 두 청소년은 한층 강화된 경찰의 추격 단속을 피해 송전소 2.5미터 높이의 담을 넘다가 변압기에 떨어져 감전사 당했던 것이었다. 이 소식을 듣고 경찰의 살인적인 추격작전을 규탄하며 청년 수백 명이차량 수십대를 불태우고 상점 등 을 공격하면서 파리 소요 사태가 시작되었다. 파리소요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된데는 사르코지 내무장관의 강경대응과 인종차별적인 발언이 중요한 역할 을 하였다.

사르코지는 교외폭력행위에 “똘레랑스 제로”를 재확인하며 단호한 대처를 천 명했고, 또한 소요에 참가한 아랍계, 아프리카계 이민청년들을 향해 “쓰레기 (racaille)”라고 부르는 모욕적인 발언을 하다. 그리고 경찰의 최류탄이 클 리시 수 부아 지역의 한 이슬람사원(모스크, mosque)에 발사 되면서 무슬림 이민자사회의 분노를 더욱 더 촉발시켰다. 당시 프랑스 대통령인 시라크(Jacques Chirac)가 진정을 촉구했으나 이 소 요 사태는 인근 파리 교외 22개 소도시로 확산 되었고 급기야 디종, 뚤루즈, 낭트, 릴, 스트라스부르 등 지방 대도시로 까지 전국 약 3000개 지역으로 퍼 졌다. 프랑스 정부는 급기야 소요가 13일째 계속된11월 9일에 1955년 이래 처음으로 국가 비상사태(l'Etat d'urgence)를 선포하면서 야간 통행금지 등 삼엄한 치안강화 활동을 펼쳤다. 이 소요사태는 경찰이 사태종료를 선언한 2005년 11월 17일까지 약 3주간 계속 되었으며, 전국적으로 약 1만대의 차 량이 방화 피해를 입었고, 경찰 헌병 등 약 1만 명이 진압에 동원 되었으며, 약 3,000명이 체포되었다. 한편 당시 정부 당국이 발표한 소요 용의자들의 신분 은대부분 14-20세의 북아프리카, 블랙 아프리카 출신 이민자 가정의 청소년 들이었다.